Art of Travel by Alain de Botton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불변한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

호텔방들 역시 정신의 습관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슷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따금 건물 내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쉭 하고 솟아오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호텔 방에 누워 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줄을 그을 수 있다. 우리의 경험에서 이제까지 무시해왔던 넓은 영역 위를 날아볼 수도 있다.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이국적이라는 말을 좀더 일시적이고 사소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만나는 장소의 매력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고향이라면 말이 있을 만한 곳에 낙타가 있다거나, 고향이라면 기둥을 세운 아파트 건물이 있을 만한 곳에 장식이 없는 아파트 건물이 있다거나. 그러나 좀더 심오한 기쁨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귀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 왜 플로베르가 이집트를 이국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프랑스에 대한 그의 감정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이집트에서 그가 이국적이라고-즉 새로운 동시에 귀중하다고-생각할 만한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고향에서 그가 분노했던 것의 이면이다. 그가 분노했던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신념과 행동이었다.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나는 위대하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서 인간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인간과 교감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보통 세상의 모든 곳에서 들끓고 있는 비열함, 이기적 관심, 거친 행동거지, 그리고 천한 욕정에 대한 확실한 안전판과 방호벽이 세워졌다.’ (워즈워스)

숭고함에 대하여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작은 공간을……생각해본다…..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또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한히 광대한 공간들 [l’infinie immensité des espaces que j’ignore et qui m’ignorent]이 이 작은 공간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섭고 놀랍다. 나는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 다른 때가 아닌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가져다놓았는가?

– 파스칼 ‘팡세’ 단장 68

숭고함(sublime)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유쾌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람을 도취시킬 수도 있다. (…)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관념은 종종 혼동된다. 이 두 말은 서로 매우 다르고 또 정반대인 사물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풍경은 힘, 인간의 힘보다 크고 인간에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을 보여줄 때만 숭고하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숭고한 장소들은 인간의 의지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에드먼드 버크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해주는 예로 거세된 수소와 거세하지 않은 황소의 비유를 들고 있다.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말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말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에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 신의 지혜가 인가의 이해를 넘어설 때, 의로운 사람은 숭고한 자연 광경을 보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다음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계속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리가 관객으로서 어느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따라서 수준이 낮은 예술은 보여줄 것과 생략할 것에 대한 일련의 수준 낮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 가운데 그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 때문에 가끔 왜곡, 생략, 색깔의 대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가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을 현실-“닮은 꼴”-이었다. 그는 더 깊은 사실주의를 성취하기 위해서 소박한 사실주의를 희생기키려고 했다. ‘나는 친구 예술가의 초상과[1888년 9월 초에 그린 ‹시인›이라는 초상화이다]를 그리고 싶어. 나는 그림 속에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고마움, 나의 사랑을 집어넣고 싶어. 우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가능한 한 충실하게 그릴 거야. 하지만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자의적으로 색채를 다루는 사람이 될 거야.’

“원래의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닮게 드린 그림에는 감탄하니, 그림이란 얼마나 허망한가”(‹팡세›, 단장 40). 그러나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화가는 단지 재현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선택을 하고 강조를 한다. 처음에는 캔버스 위에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발견하지만, 나중에는 캔버스가 그려진 장소에서 그런 요소들을 환영하게 된다.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카메라가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 자신이 그 장소 안에 좀더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그 장소도 우리 안에 좀더 확실하게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존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극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다섯 가지 핵심적인 결혼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에 달려 있다.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러스킨의 ‘말 그림’은 어떤 장소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방법(“잔디는 녹색이고, 땅은 회색을 띤 갈색이었다”)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언어로 그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분석하는 방법(“풀은 대범해 보이고, 땅은 소심해 보였다”)이기 때문에 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는 많은 장소들이 미학적 기준이 아니라 심리적 기준에서 우리에게 아름답게 비친다는 점을 인식했다. 

저 나무들의 가냘픈 생명에 감추어진 어두운 에너지나 매혹된 자존심이 드러내는 단조로움과 비교하면, 바위는 연약하고, 허약하고, 일관성이 없게 보인다.

밤은 진지함에 대한 관료적 환상을 흔들어놓았다.

러스킨이 예술의 두 가지 목적이라고 말했던 것-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보는 것.

습관에 대하여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팡세› 단장 136)

드 메스트르의 ‹나의 침실 여행›은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통찰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가 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나는 여러 가지 불평들의 공통점들-늘 이기심이 문제이고, 늘 맹목성이 문제이다-을 떠올려보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불평한다는 오래된 심리학적 진리를 생각해보았다. 혼자 여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80년 뒤에 드 메스트르의 책을 읽고 그에게 감탄했던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니체는 그 생각을 이렇게 밀고 나아갔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 Alain de Botton – Art of 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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