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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피로했던 오늘의 아침.

남편이 출근하고 며칠 사이 기어다니기 시작해 무척이나 활동적인 아이를 안고 ‘현실도피’ 혹은 ‘추억여행’스러운 생각에 잠긴다. 내가 머물렀던 장소들을 생각했고, 그 곳들에 들러 내 20대에 풍성한 추억을 안겨주었던 친구들과 사랑과 사람들을 생각했다.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며, 책을 읽어주며, 졸린 아이를 달래며 자꾸만 생각이 옆길로 새 그 때 그 시절에 가 있다. 당시 경험했던 사건과 감정들이 당시의 말랑한 가슴을 크게 움직여서였는지, 회상만해도 다시 그 아픔, 그 벅참, 그 설렘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그러다 잠이 들어, 스물 다섯의 나와 그 때 내가 있었던 파리 15구와 그 여름 나를 찾아와주었던 친구 S가 나오는 꿈을 꾼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를 내게 각인시켜주려했던 그와 ‘남녀 사이에 친구도 있다’를 증명하려했던 나 사이에 애매했던 관계는 서로의 꾸준하고도 일방적인 생각덕에 10년이 넘게 유지되었다. 무더웠던 여름밤, 와인을 마시기 위해 몽파르나스까지 걸어 헤매다 문이 열린 와인바를 하나 발견했었지. 거기서 결국 술을 마셨던가. 시트로엥 공원에 갔던 건 언제였지..

잠에서 깨어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이유식도 먹이고, 사진도 찍고 놀아주다 옛날 이메일들을 뒤적거려 S의 정성스런 이메일들을 다시 읽었다. 그 뿐 아니라, 타국에서 외로움과 내 자신과 싸우며 사랑을 찾고 이별을 경험하던 풋풋하고 또 따가웠던 20대 중반의 나를 다독이고 응원해주었던 많은 친구와 관계들의 흔적을 다시 읽었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자신있고 당찼고 또한 말랑한 감성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던 그런 나였구나..생각하며, 아이가 장난감에 꽂힌 사이 남편이 어제 사다 준 남편을 얼른 꾸역꾸역 밀어넣는 내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내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데..라고 더 이상 말하기 어려워졌다. 많이 달라졌다. 그 때의 내가 아니다. 달라져야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는 변화이니까. 하지만, ‘더 멀리, 앞으로, 밖으로’를 매일같이 속으로 외치며 관계와 일과 미래와 자신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내가 아니라, 아기와 가족을 위해, 안으로, 조용히 힘든 것을 견디며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살아가는 내가 되어버린 지금,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분명, 내게 더 위안과 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있지 싶어진다.

풋풋했던 그 때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곱씹으며 미래를 이야기해보고 싶어진다. 그 때의 내 감성을, 감정을, 결심을, 노력을 기억하는 당신들은 지금 어떤 오늘을 보내고 있는지?

필립이는 지난 주말을 지나며, 앞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신기하고 놀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몇주동안 ‘앞으로, 더 멀리, 밖으로’를 몸소 실천하며 연습하던 필립이었다. 결실을 맺는 것이 자신도 만족스러웠는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아이의 눈을 보고 눈물이 나왔다. 내가 바라는 것을 네가 대신 해주고 있는거니..

아이가 커 가는 것, 매일 스펀지가 물 먹는 것처럼 습득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그 유명하다는 루브르나 오르세 박물관을 몇날 몇일 구경하는 것보다 감동적이다. “엄마한테 와보세요”했더니 기었다 쉬었다 다시 기어와 내 손을 붙드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의 감동.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모나리자가 갑자기 살아나 윙크를 해준다고 해도 이 만큼 신비롭고 감동적일 수 있을까. 뭐든지 잡고, 입에 넣어보고, 만지고, 알고 싶은 아이에게 나는 어떤 교육으로 세상을 알려줄 수 있을까. 머리가 아프다. 너무 큰 책임감이다. 그 동안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익숙한 나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나의 모든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고 책임과 부담이 자신없다.

20대에 고뇌하며 보냈던 밤들은 내게 새로운 평화와 성숙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30대가 되어 겪는 지금의 책임감, 불안함, 고뇌는 더 반짝일 미래에 밑거름이 되어주겠지. 나는 잘 해낼 수 있다. 쭉 노력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할 수 있다. 그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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